오우치 요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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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요시타카는 1507년에 태어나 1551년에 사망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 오우치 씨의 15대 당주였다. 그는 규슈 지역의 패권을 다투며 세력을 확장했고, 명나라 및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또한, 교토의 문화를 받아들여 '서쪽의 교토'로 불릴 만큼 야마구치를 번성시켰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초청하여 기독교 전도를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가신 스에 다카후사와의 갈등, 아마고 씨와의 전투 패배, 그리고 문치주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가신들의 지지를 잃고, 결국 스에 다카후사의 반란으로 자결하며 오우치 씨는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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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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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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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우치 요시타카 (大内 義隆) |
출생 | 1507년 12월 18일 |
사망 | 1551년 9월 30일 (향년 43세) |
출생지 | 야마구치, 일본 |
사망 장소 | 다이네이 사원, 나가토, 일본 |
아명 | 기도마루 (亀童丸) |
계명 | 류후쿠지덴 즈이운주텐다이고지 (竜福寺殿瑞雲珠天大居士) |
묘소 | 다이네이지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종5위상 사쿄다이부 정5위하 수오노스케 지쿠젠노카미 종4위하 다자이다이니 사효에곤노스케 종4위상 효부곤노다이스케 정4위하 이요노스케 종3위 시종 정3위 병부경 종2위 야마시로노카미 |
직위 | 무로마치 막부 수오 나가토 이와미 부젠 지쿠젠 슈고 |
주군 | 아시카가 요시하루 요시테루 |
가문 | |
씨족 | 오우치 씨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오우치 요시오키 어머니: 나이토 히로요리의 딸, 도쿄도노 |
형제자매 | 오미야히메 (요시미 다카요리, 후에 요시미 마사요리의 부인) 요시타카 여자 ( 오토모 요시아키라의 정실) 여자 ( 호소카와 모치타카의 정실) 여자 ( 이치조 후사유키의 부인) 히로오키 여자 ( 아시카가 요시츠나의 정실) |
배우자 | 정실: 마데노코지 사다코 ( 마데노코지 히데후사의 딸) 계실: 오쓰키 씨 (오사이노카타) |
측실 | 나이토 오키모리의 딸 히로하시 가네히데의 딸, 고토쿠인 고신조 하토리 타몬의 딸, 이코마 부인 오하라 씨 |
자녀 | 슈코 요시타카 몬다 카메츠루마루 (요시노리) 오이시 요시타네 |
양자 | 하루모치 요시나가 (하루히데) 오자키노쓰보네 ( 모리 다카모토의 부인) |
경력 | |
주요 활동 | 슈고 다이묘 (수오, 나가토, 이와미, 부젠, 지쿠젠) |
이전 직위 | 오우치 요시오키 |
이후 직위 | 오우치 요시나가 |
2. 생애
에이쇼 4년(1507년) 음력 11월 15일 스오, 나가토의 태수이자 오우치 씨 제15대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적자로 오우치 씨 관저에서 태어났다.[20][21] 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였는데, 이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마사히로 등 오우치 역대 당주들이 사용해 온 이름이다.
어린 시절 유모와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고, 소년 시절에는 스케도노 님(介殿様)라고 불렸다. 이는 스오노스케(周防介)의 약칭으로 오우치 당주의 지위로 세습되어 온 것이었다. 1520년 시점에 요시타카가 스케도노 님으로 기록(『高嶺太神宮伝記』)되고 있어 이 무렵 스오노스케로 서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로부터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원복(元服)을 행하고 '''요시타카(義隆)'''라 이름하였다.
원복 후 1522년과 1524년에 아버지 요시오키를 따라 아키로 출진하였다. 1523년 닝보의 난 발발 후 오우치 씨는 동중국해 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1528년 12월 아버지 사망으로 22세에 오우치 가독을 상속받았다. 1529년 12월 23일 조정으로부터 종5위상 관위를 받았다. 이듬해 1530년 10월 9일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로 임명되었다.
1530년부터 규슈로 출병하여 기타큐슈의 패권을 놓고 분고의 오토모 씨, 지쿠젠의 쇼니 씨와 대립하였다.
1532년 오토모 씨가 쇼니 씨와 결탁해 침공하자, 야마구치현 조후에서 진을 쳤다.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 관직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4]
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 씨로부터 이반시키고, 스에 오키후사에게 명하여 오토모 씨의 본거지 분고를 공략하게 했으나 실패했다(세이바카하루 전투). 한편 요시타카는 기타히젠의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요시나가를 쳐서 시부카와 씨를 멸망시켰다.[4] 같은 해 고나라 천황 즉위에 맞춰 교토 조정에 2천 관(貫)을 기부하고 이듬해 다자이노다이니 관직 임명을 요청했다. 고나라 천황은 윤허하는 듯하다 하루 만에 취소했다.[4]
1536년 요시타카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다자이노다이니에 임관되었다. 1537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교토 방문 및 막부 정치 참여 요청을 받았으나, 아마고 씨에 저지되고 영지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을 미루었다.[4]
1538년 쇼군 요시하루의 중개로 숙적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했다.[4] 1539년 아버지 대부터 오우치를 보좌해 왔던 스에 오키후사가 병으로 사망했다.[4]
1540년 아마고 쓰네히사의 손자 아키히사(훗날의 하루히사)가 아키로 침공, 오우치에 종속되어 있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코리 산성에서 충돌했다(요시다코리 산성 전투).[4] 이후 아마고 씨에 대한 공세를 거듭하여 1541년 아마고 편에 섰던 다케다 노부자네 ・ 노부시게 등 아키 다케다 씨와 도모다 오키후지 등 도모다 씨를 멸문시키고 아키를 완전히 오우치 세력 아래에 두었다.[4]
1541년 11월, 아마고 쓰네히사 사망 후 1542년 1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즈모 국(出雲国)으로 원정을 떠나 아마고 씨의 거성 갓산도다 성(月山富田城)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고쿠진(国人) 영주들의 배신으로 하루히사에게 대패했다(갓산도다 성 전투). 이 패전으로 양자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고 영토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은 요시타카는 문치파 사가라 다케토(相良武任) 등을 중용하게 되었고, 무단파 스에 다카후사(陶隆房)나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등과 대립하게 된다.[10]
1547년 덴류지 승려 사쿠겐 슈료(策彦周良)를 견명사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했다. 이것이 마지막 견명선이었다. 조선에도 승려 계유서당(稽囿西堂)을 보냈다.
1548년 류조지 다네노부(龍造寺胤信)와 동맹을 맺었다. 다네노부는 요시타카에게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다카노부(隆信)'''로 개명했다.
1550년 야마구치에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도착했다. 처음에는 하비에르의 추레한 차림과 무례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껴 기독교 전도를 허락하지 않았다.[11] 1551년 4월 하순, 요시타카는 다시 하비에르를 만났다. 하비에르는 수려한 복장을 갖추고 진귀한 문물들을 바쳤고, 이에 흡족한 요시타카는 기독교 전도를 허락하고 다이도지(大道寺)를 거점으로 제공했다. 이것이 예수회의 일본 기독교 전도의 시작이었다.
2. 1. 유년기 및 가독 상속
에이쇼 4년(1507년) 음력 11월 15일 스오, 나가토의 태수(太守)이자 오우치 씨 제15대 당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적자로 오우치 씨 관저에서 태어났다.[20][21] 어머니는 요시오키의 정실로, 오우치가 다스리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나가토의 슈고다이(슈고 대리) 나이토 히로요리의 딸이다.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라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마사히로 등 오우치 역대 당주들이 사용해 온 이름이기도 했다. 요시타카는 어려서부터 적자의 지위를 명확히 굳히고, 동시에 오우치 집안에서 역대로 대물림되다시피 했던 가독 상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분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렇게 명명된 것이기도 했다.
요시타카는 어렸을 때는 유모나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고, 소년 시절에는 스케도노 님(介殿様)라고 불렸는데, 이는 스오노스케(周防介)의 약칭으로 오우치 당주의 지위로 세습되어 온 것이었고 요시타카가 적자로서 취급되었다는 증좌이기도 했다. 한편 요시타카가 스오노스케가 된 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1520년 시점에서는 요시타카가 스케도노 님으로 기록되고 있어서(『高嶺太神宮伝記』) 이 무렵에 스오노스케로 서임되지 않았나 여겨지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쇼군(将軍) ・ 아시카가 요시타네로부터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원복(元服)을 행하고 '''요시타카(義隆)'''라 이름하였다.
원복을 행한 뒤인 1522년과 1524년에 아버지 요시오키를 따라 아키로 출진하였다. 이때에는 5월에 별동대를 거느리고 이와쿠니 요코지(岩国永興寺)로 해서 6월에 이쓰쿠시마로 들어가, 7월에 스에 오키후사와 함께 아키 다케다 씨의 사토카나 산성(佐東銀山城)을 공격한다. 그러나 8월 아마고 측으로부터 원군으로 온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해 퇴각한다. 그리고, 산인의 아마고 씨와도 교전한다.
이 무렵에 교토의 구교(公卿)인 만리코지 히데후사의 딸 테이시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523년에 닝보의 난이 발발하고, 이후 오우치 씨는 동중국해의 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1528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요시타카는 22세로 오우치의 가독을 상속받았다. 오우치 집안에서는 가독 상속을 즈음해서 일족 가신들 사이에 내홍이 일어나는 것이 거의 상례나 다름없었지만, 요시타카가 가독을 상속받을 때에는 그러한 내홍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요시타카의 동생인 히로오키(弘興)가 요절하여 요시타카 외에 다른 가독을 다툴 만한 친족이 없기도 했고, 더불어 중신인 스에 오키후사의 보조가 크게 한몫하였기 때문이다.
1529년 12월 23일, 교토의 조정으로부터 종5위상 관위를 받았다. 이듬해 1530년 10월 9일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로 임명되었다.
2. 2. 세력 확대
교로쿠 3년(1530년)부터 요시타카는 규슈로 출병하여, 기타큐슈의 패권을 놓고 분고의 오토모 씨와 지쿠젠의 쇼니 씨와 대립하였다. 가신 스기 오키쓰라, 스에 오키후사에게 군을 맡겨 쇼니 씨를 공격하고, 히젠의 마쓰라 씨를 복속시키는 등 기타큐슈 연안을 평정해 대중국 · 대조선 무역의 이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류조지 이에카네의 반격으로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4]덴분 원년(1532년) 오토모 씨가 쇼니 씨와 결탁해 침공해 오자, 야마구치현 조후에서 진을 쳤다.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 관직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4]
덴분 3년(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 씨로부터 이반시키고, 스에 오키후사에게 명하여 오토모 씨의 본거지인 분고를 공략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세이바카하루 전투). 한편으로 요시타카는 기타히젠의 규슈 단다이 ・ 시부카와 요시나가를 쳐서 시부카와 씨를 멸망시켰다.[4]
같은 해 고나라 천황의 즉위에 맞춰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2천 관(貫)을 기부하고 다음 해 자신에게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에 임관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나라 천황은 일단 윤허하는가 싶다가 하루 만에 취소하였다고 한다.[4]
덴분 5년(1536년)에 요시타카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다자이노다이니에 임관되는데 성공했다. 기타큐슈 공략의 대의명분을 얻은 요시타카는 9월에 류조지 씨와 함께 히젠 다쿠 성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공격, 쇼니 씨를 멸문시키고 기타큐슈 평정을 대부분 달성하였다. 이때, 류조지 본가 당주인 류조지 다네미쓰를 히젠의 슈고다이로 임명한다.[4]
덴분 6년(1537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교토로 와서 막부 정치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상경을 시도하지만, 산인을 통일하고 남하해 오는 아마고 씨에 저지되고, 더욱이 령국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은 다음으로 미루었다.[4]
덴분 7년(1538년) 쇼군 요시하루의 중개로 요시타카는 자신의 숙적이었던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한다.[4]
덴분 8년(1539년) 아버지 대부터 오우치를 보좌해 왔던 스에 오키후사가 병으로 사망하였다.[4]
덴분 9년(1540년) 아마고 쓰네히사의 손자 아키히사(훗날의 하루히사)가 아키로 침공하였고, 오우치에 종속되어 있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코리 산성에서 충돌한다(요시다코리 산성 전투). 요시타카는 오키후사의 아들인 다카후사(훗날의 스에 하루카타)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보내 아마고 군을 격파한다.[4]
이후 아마고 씨에 대한 공세를 거듭하여 덴분 10년(1541년) 아마고 편에 서 있던 다케다 노부자네 ・ 노부시게 등 아키 다케다 씨와 도모다 오키후지 등 도모다 씨를 멸문시키고 아키를 완전히 오우치 세력 아래에 두게 된다.[4]
2. 3. 문치주의와 쇠퇴
덴분 10년(1541년) 11월, 아마고 쓰네히사가 사망하자 덴분 11년(1542년) 1월에 요시타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즈모 국(出雲国)으로 원정을 떠나 아마고 씨의 거성 갓산도다 성(月山富田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배하 고쿠진(国人) 영주들의 배신으로 하루히사에게 대패하였다(갓산도다 성 전투). 이 패전으로 총애하던 양자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고 영토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된 요시타카는 이후 문치파 사가라 다케토(相良武任) 등을 중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무단파 스에 다카후사(陶隆房)나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등과 대립하게 된다.[10]덴분 16년(1547년) 덴류지의 승려 사쿠겐 슈료(策彦周良)를 견명사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견명선이었다. 조선에도 승려 계유서당(稽囿西堂)을 보냈다.
덴분 17년(1548년) 류조지 다네노부(龍造寺胤信)와 동맹을 맺었다. 다네노부는 요시타카로부터 그의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서 '''다카노부(隆信)'''로 이름하였다. 다카노부는 오우치 씨의 힘을 배경으로 가독 상속에 불만을 품었던 가신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덴분 19년(1550년) 야마구치에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도착했다. 처음에 오랜 여정으로 꼬질꼬질한 차림이 된 하비에르는 면담하러 오라는 요시타카의 명령에 추레한 차림 그대로 요시타카를 위한 아무런 선물도 하나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요시타카를 만나러 왔고, 요시타카를 만난 자리에서도 요시타카의 '방탕함'이나 당시 일본의 종교였던 불교에 대해 다이묘가 나서서 보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거나,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던 남색(男色) 등을 요시타카 면전에서 비난하는 등 예의를 크게 잃은 모습을 보여, 요시타카는 그에게 불쾌함을 느끼고 기독교 전도 허가를 주지 않았다.[11] 이에 하비에르는 기나이(畿内) 지역을 떠돌게 되었다. 같은 해 스에나 나이토 등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가 퍼져, 요시타카는 일시 오우치군을 거느리고 저택에서 농성을 벌일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반란 소식은 단순한 뜬소문으로 그쳤고, 측근인 레이제이 다카토요(冷泉隆豊)가 무단파에 대한 토벌을 진언하였으나, 요시타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덴분 20년(1551년) 4월 하순에 요시타카는 다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면담하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기나이를 떠돌면서 배운 경험으로 처음 일본에 왔을 때와는 달리 귀인(貴人)을 만나 뵐 때에는 외관이 중시된다는 점을 깨닫고, 요시타카와의 두 번째 면담에서 수려한 복장을 갖추고 나아가 진기한 문물들을 바쳤다. 이때 하비에르가 요시타카에게 바친 물품은 본래는 교토의 천황에게 봉정할 계획이었던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과 고아 사교(司教)의 친서 외에 망원경, 양금(洋琴), 치시계(置時計), 유리 물주전자, 거울, 안경, 책, 그림, 소총 등이었다고 한다. 하비에르의 전략은 주효하여 그와의 두 번째 면담에서 흡족해한 요시타카는 마침내 하비에르에게 기독교 전도를 허락했고, 그 거점으로 당시 폐찰되어 있던 빈 절간 다이도지(大道寺)를 받게 된다. 이것이 예수회의 일본 기독교 전도의 시작이었다.
- 요시타카가 일문 내에서 가신들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가 강력히 밀어붙인 아마고 공격이었고, 그 전투에서 패한 것도 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 다카후사와 대립한 원인은 문치, 무단파의 대립 외에 스에 씨가 이전에 횡령한 도다이지의 옛 영지를 반환하도록 요시타카가 명령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점에서도 요시타카의 복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 오우치 씨는 후다이 가신이 영지를 다스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 영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 국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었다.
- 적남이 사망한 뒤에는 문약한 경향에 빠졌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실제로는 문치파를 형성하여 다이묘 자신과 근신(近臣)들로 구성된 가신단에 의한 다이묘 권력의 강화를 도모한 것이었다.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강화되었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슈고다이나 호족들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슈고다이의 독자성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다만 한편으로 보면 조세 징수 등의 행정 권한의 대부분을 야마구치에 있던 부교닌(奉行人)이나 그들이 파견한 군다이(郡代, 문치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장악되고, 군사 활동이 저조해지면서 군사적 권한을 배경으로 하던 슈고다이들의 오우치 가문 내의 발언력이 상실되고, 이로 인해 스에 다카후사 등 슈고다이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는 견해도 있다.
3. 정치 및 외교
1530년부터 요시타카는 규슈로 출진하여, 분고의 오토모 씨와 지쿠젠의 쇼니 씨와 대립하였다. 가신 스기 오키쓰라와 스에 오키후사에게 군을 맡겨 쇼니 씨를 공격하고, 히젠의 마쓰라 씨를 복속시키는 등 기타큐슈 연안을 평정해 대중국 · 대조선 무역의 이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류조지 이에카네의 반격으로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26]
1532년 오토모 씨가 쇼니 씨와 결탁해 침공해 오자, 야마구치현 조후에서 진을 쳤다.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 씨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고, 스에 오키후사에게 명하여 오토모 씨의 본거지인 분고를 공략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세바가하라 전투). 한편으로 요시타카는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요시나가를 쳐서 시부카와 씨를 멸망시켰다.
그 해 고나라 천황의 즉위에 맞춰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2천 관을 기부하고, 다음 해 자신에게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에 임관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고나라 천황은 하루 만에 취소하였다.
1536년 요시타카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다자이노다이니에 임관되었다. 9월에 류조지 씨와 함께 히젠 다쿠 성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공격, 쇼니 씨를 멸문시키고 기타큐슈 평정을 대부분 달성하였다. 이때, 류조지 다네미쓰를 히젠의 슈고다이로 임명하였다.
1537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요청으로 상경을 시도하지만, 아마고 씨에 저지되고, 영토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1538년 쇼군 요시하루의 중개로 요시타카는 자신의 숙적이었던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하였다.
1540년 아마고 쓰네히사의 손자 아마고 하루히사가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코리야마 성을 공격하자(요시다코리야마 성 전투),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보내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아마고 씨에 대한 공세를 거듭하여 1541년 아키 다케다 씨와 도모다 씨를 멸문시키고 아키를 완전히 오우치 세력 아래에 두게 된다.
요시타카는 명나라, 조선과 무역해 왔고, 호소카와 씨와 싸워 대명무역(감합무역)을 독점하였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하여 독자적으로 오우치판(大内版)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1542년 조선의 김안국에게 서신을 보내어 주자가 주석한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구하였고, 김안국은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주석서는 정전(程傳)의 《주역》, 호전(胡傳)의 《춘추》, 채전(蔡傳)의 《서경》, 주전(朱傳)의 《시경》, 정주(鄭註)의 《예기》이며, 조선에서 통용되는 경전들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주석한 것은 없다고 회답하였다고 한다(《이칭일본전》).
3. 1. 내정
덴분 10년(1541년) 11월, 아마고 쓰네히사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덴분 11년(1542년) 1월 요시타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즈모국(出雲国)으로 원정하여 아마고 씨의 거성인 갓산도다 성(月山富田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휘하 고쿠진(国人) 영주들의 배신으로 하루히사에게 대패하였다(갓산도다 성 전투). 이 패전으로 총애하던 양자 오우치 하루모치를 잃은 요시타카는 이후 문치파 사가라 다케토(相良武任) 등을 중용하게 되었고, 무단파 스에 다카후사(陶隆房)나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등과 대립하게 된다.[10]덴분 16년(1547년) 덴류지의 승려 사쿠겐 슈료(策彦周良)를 견명사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견명선이었다. 조선에도 승려 계유서당(稽囿西堂)을 보냈다.
덴분 17년(1548년) 류조지 다네노부(龍造寺胤信)와 동맹을 맺었다. 다네노부는 요시타카로부터 그의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다카노부(隆信)'''로 개명하였다. 다카노부는 오우치의 힘을 배경으로 가독 상속에 불만을 품었던 가신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덴분 19년(1550년) 야마구치에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도착했다. 처음에 오랜 여정으로 꼬질꼬질한 차림이 된 하비에르는 면담하러 오라는 요시타카의 명령에 추레한 차림 그대로 요시타카를 위한 아무런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요시타카를 만나러 왔다. 요시타카를 만난 자리에서도 요시타카의 '방탕함'이나 당시 일본의 종교였던 불교를 다이묘가 나서서 보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거나, 당시 다이묘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던 남색(男色) 등을 요시타카 면전에서 비난하는 등 예의를 크게 잃은 모습을 보였다. 요시타카는 그에게 불쾌함을 느끼고 기독교 전도 허가를 주지 않았다. 이에 하비에르는 기나이(畿内) 지역을 떠돌게 되었다. 같은 해 스에나 나이토 등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가 퍼져, 요시타카는 일시 오우치군을 거느리고 저택에서 농성을 벌일 준비를 하였다. 이때의 반란 소식은 단순한 뜬소문으로 그쳤고, 측근인 레이제이 다카토요(冷泉隆豊)가 무단파에 대한 토벌을 진언하였으나, 요시타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덴분 20년(1551년) 4월 하순, 요시타카는 다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면담하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기나이를 떠돌면서 귀인을 만날 때에는 외관이 중시된다는 점을 깨닫고, 요시타카와의 두 번째 면담에서는 수려한 복장을 갖추고 진기한 문물들을 바쳤다. 이때 하비에르가 요시타카에게 바친 물품은 본래 교토의 천황에게 봉정할 계획이었던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과 고아 사교(司教)의 친서 외에 망원경, 양금(洋琴), 치시계(置時計), 유리 물주전자, 거울, 안경, 책, 그림, 소총 등이었다. 하비에르의 전략은 주효하여 요시타카는 하비에르에게 기독교 전도를 허락했고, 그 거점으로 당시 폐찰되어 있던 빈 절간 다이도지(大道寺)를 주었다. 이것이 예수회의 일본 기독교 전도의 시작이었다.
요시타카는 문화적 관심이 많아, 문치주의적 센고쿠 다이묘로 알려져 있다. 산조니시 사네타카(三条西実隆) 등의 문화인과 교류하고, 와카(和歌)와 렌카(連歌), 문예 등 교토풍 구게(公家)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또, 교토 조정에 돈을 바쳐 관직을 얻고자 했고, 소쿠타이(束帯) 차림으로 우차(牛車)를 타고 다니는 등 귀족적 취미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학문에서도 고서를 좋아했던 것이나 화압(花押)의 형식 등을 보아도 복고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 사료되고 있다. 그러나 오우치 집안 역대 당주들은 대대로 그러한 경향이 강해 요시타카의 문제점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이 무렵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西の京)라 불릴 만큼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정책에 있어서도 보수적으로 사치금지령과 지세 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하였다. 사찰과 신사의 부흥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자이노다이니로 임명된 뒤에는 다자이후(大宰府)다이니로서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다이후센(大府宣)이라 부르기도 했다. 나아가 요시타카와 가신단의 관위도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처럼 멋대로 자칭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교토 조정에 주청해 받은 실제 관위였다. 이와 같이 복고적인 정치형태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명나라, 조선과 무역해 왔고, 오우치씨는 간레이 가문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싸워 대명무역(감합무역)을 독점한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하여 독자적으로 오우치판(大内版)으로 다시 출판한다. 또한 요시타카는 야마구치의 시가를 교토풍의 조방제 도시로 정비하고, 성곽을 쌓지 않고 오우치 관을 거소로 사용하였다.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초청하여 야마구치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허락하는 등 개명적인 인물이기도 하였다.
생전 주변 구니의 무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하코자키 궁(箱崎宮)을 재건한다거나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우사 신궁(宇佐神宮) 등 많은 신사들을 극진히 보호하여 스님들의 평판이 높았고 문화인, 구게(公家)들로부터 「말세의 도인」(末世の道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당시 하카타(博多)의 기온 야마가사(祇園山笠)의 가키야마(舁き山)는 12개였는데 요시타카가 야마구치의 기온회(祇園会)로 여섯 개를 나누어 가져가면서 하카타 기온 야마가사의 가키야마가 6개가 되었다.[26]
조선 중종 37년에 해당하는 덴분 11년(1542년)에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에게 서신을 보내 주자가 주석한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구하였고, 김안국은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주석서는 정전(程傳)의 《주역》, 호전(胡傳)의 《춘추》, 채전(蔡傳)의 《서경》, 주전(朱傳)의 《시경》, 정주(鄭註)의 《예기》이며, 조선에서 통용되는 경전들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주석한 것은 없다고 회답하였다고 한다(《이칭일본전》). 마쓰시타 겐린은 오우치 요시타카가 요청한 신주란 영락 13년(1415년)에 명의 영락제가 편찬하게 한 《오경대전주》(五經大全註)를 가리키는데 조선에는 이 책이 들어오지 않아서 김안국이 이렇게 대답한 것이고, 이후 명의 배가 이 책을 싣고 일본으로 왔지만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를 보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시타카가 가신들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단파인 스에 다카후사가 강력히 밀어붙인 아마고 공격이었고, 그 전투에서 패한 것도 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카후사와 대립한 원인은 문치, 무단파의 대립 외에 스에씨가 이전에 횡령한 도다이지의 옛 영지를 반환하도록 요시타카가 명령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점에서도 요시타카의 복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오우치 씨는 후다이 가신이 영지를 다스리고 이를 토대로 여러 영지를 다스리는 일종의 연방제 국가였다. 이 때문에 그들과 긴밀한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적남이 사망한 뒤에는 문약한 경향에 빠졌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실제로는 문치파를 형성하여 다이묘 자신과 근신(近臣)들로 구성된 가신단에 의한 다이묘 권력 강화를 도모한 것이었다. 때문에 정치적 권력은 강화되었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슈고다이(守護代)나 호족들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슈고다이의 독자성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다만 한편으로 보면 조세 징수 등의 행정 권한의 대부분을 야마구치에 있던 부교닌(奉行人)이나 그들이 파견한 군다이(郡代, 문치파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장악되고, 군사 활동이 저조해지면서 군사적 권한을 배경으로 하던 슈고다이들의 오우치 가문 내 발언력이 상실되고, 이로 인해 스에 다카후사 등 슈고다이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는 견해도 있다.
3. 2. 대외 관계
1530년부터 요시타카는 규슈로 출진하여, 분고의 오토모 씨와 지쿠젠의 쇼니 씨와 대립하였다. 가신 스기 오키쓰라와 스에 오키후사에게 군을 맡겨 쇼니 씨를 공격하고, 히젠의 마쓰라 씨를 복속시키는 등 기타큐슈 연안을 평정해 대중국 · 대조선 무역의 이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류조지 이에카네의 반격으로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26]1532년 오토모 씨가 쇼니 씨와 결탁해 침공해 오자, 야마구치현 조후에서 진을 쳤다.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34년 류조지 이에카네와 비밀리에 결탁해 쇼니 씨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고, 스에 오키후사에게 명하여 오토모 씨의 본거지인 분고를 공략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세이바카하루 전투). 한편으로 요시타카는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요시나가를 쳐서 시부카와 씨를 멸망시켰다.
그 해 고나라 천황의 즉위에 맞춰 요시타카는 교토 조정에 2천 관을 기부하고, 다음해 자신에게 다자이노다이니 관직에 임관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고나라 천황은 하루 만에 취소하였다.
1536년 요시타카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다자이노다이니에 임관되었다. 9월에 류조지 씨와 함께 히젠 다쿠 성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공격, 쇼니 씨를 멸문시키고 기타큐슈 평정을 대부분 달성하였다. 이때, 류조지 다네미쓰를 히젠의 슈고다이로 임명하였다.
1537년 무로마치 막부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요청으로 상경을 시도하지만, 아마고 씨에 저지되고, 령국 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상경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1538년 쇼군 요시하루의 중개로 요시타카는 자신의 숙적이었던 오토모 요시아키와 화친하였다.
1540년 아마고 쓰네히사의 손자 아마고 하루히사가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코오리 산성을 공격하자(요시다코오리 산성 전투),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보내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아마고 씨에 대한 공세를 거듭하여 1541년 아키 다케다 씨와 도모다 씨를 멸문시키고 아키를 완전히 오우치 세력 아래에 두게 된다.
1542년 요시타카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즈모 국으로 원정하여 갓산도다 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지배하 고쿠진 영주들의 배신으로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대패하였다(갓산도다 성 전투).
1547년 덴류지의 승려 사쿠겐 슈료를 견명선으로 임명해 명나라로 파견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견명선이었다. 조선에도 승려 계유서당(稽囿西堂)을 보냈다.
1548년 류조지 다카노부와 동맹을 맺었다. 다카노부는 요시타카로부터 그의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서 '''다카노부(隆信)'''로 이름하였다.
1550년 야마구치에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도착했다. 요시타카는 하비에르의 무례한 태도에 불쾌함을 느껴 기독교 전도 허가를 주지 않았다. 이에 하비에르는 기나이 지역을 떠돌게 되었다.
1551년 요시타카는 다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면담하였다. 하비에르는 수려한 복장을 갖추고 망원경, 양금, 탁상시계, 유리 물주전자, 거울, 안경, 책, 그림, 소총 등 진귀한 문물들을 바쳤다. 요시타카는 흡족해하며 하비에르에게 기독교 전도를 허락했고, 그 거점으로 당시 폐찰되어 있던 빈 절간 다이도지를 받게 된다.
요시타카는 명나라, 조선과 무역해 왔고, 호소카와 씨와 싸워 대명무역(감합무역)을 독점하였다. 조선으로부터는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하여 독자적으로 오우치판(大内版)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1542년 조선의 김안국에게 서신을 보내어 주자가 주석한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구하였고, 김안국은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주석서는 정전(程傳)의 《주역》, 호전(胡傳)의 《춘추》, 채전(蔡傳)의 《서경》, 주전(朱傳)의 《시경》, 정주(鄭註)의 《예기》이며, 조선에서 통용되는 경전들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주석한 것은 없다고 회답하였다고 한다(《이칭일본전》).
4. 다이네이지의 변
무단파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요시타카는 야마구치 천도 계획을 세웠으나[22] 덴분 20년(1551년) 8월 말에 요시타카와 험악한 관계가 되어 있던 무단파 스에 다카후사 등(스오 국의 슈고다이)이 「교토의 상의」(京都の上意)[23]를 받았다는 명분으로 모반을 일으켰다. 중신 나이토 오키모리(나가토 국 슈고다이)도 이를 묵인하여 요시타카를 구원하지 않았다.
요시타카는 친척인 쓰와노의 요시미 마사요리에게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폭풍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 나가토 후카가와(深川)의 사찰 다이네이지(大寧寺)로 가서 그곳에서 농성한다. 요시타카를 끝까지 따랐던 오우치 일문의 중신 레이제이 다카토요가 분전하여 몇 차례 승리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수적으로 요시타카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요시타카는 더는 이 상황을 타개할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9월 1일 10시경 자결하였다. 가이샤쿠(介錯)를 맡은 것은 레이제이 다카토요였다. 향년 45세였다.[24]
오우치 요시타카가 죽기 직전에 읊은 구절은 「공격을 하는 자, 공격을 당하는 자, 어느 누구나 모두 하나이니,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如露亦如電 応作如是観)」이라고 전한다.
요시타카의 친아들 요시타카(義尊)도 9월 2일에 스에 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요시타카 부자의 죽음으로 스오 오우치 집안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또한 이때 스오에 머무르고 있던 산조 기미요리(다케다 신겐의 장인)나 니조 다다후사를 비롯한 많은 구게(公家)들도 이 모반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요시타카는 오우치 집안이나 영지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고, 교토의 구교와 같은 생활을 지향하며 중앙 지향적인 자세를 관철했으므로 스오의 국정을 무시하고 임시 과세를 늘린 것이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5. 인물 및 일화
- 요시타카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 산조니시 사네타카 등 당대 문화인들과 교류하며 와카(和歌)와 렌카(連歌) 등 구게(公家)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교토 조정에 재물을 바쳐 관직을 얻고자 했으며, 소쿠타이(束帯) 차림으로 우차(牛車)를 타는 등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 학문에서는 고서를 좋아하고 화압(花押) 형식을 따르는 등 복고주의적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오우치 가문 역대 당주들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이었고, 당시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 불릴 만큼 번영했다.[25]
- 정책적으로도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 사치 금지령과 지세 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다. 사찰과 신사에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자이노다이니로 임명된 후에는 자신이 내리는 명령을 다이후센(大府宣)이라 칭하기도 했다. 요시타카와 가신단의 관위는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처럼 자칭한 것이 아니라 조정에 청하여 받은 실제 관위였다.[18]
- 명나라, 조선과 무역했고,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싸워 감합무역(勘合貿易)을 독점했다. 조선에서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하여 오우치판(大内版)으로 출판했다. 야마구치의 시가지를 교토풍으로 정비하고, 오우치 씨 관저를 거점으로 사용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초청하여 야마구치에서 기독교 전도를 허락하는 등 개명적인 면모도 보였다.
- 하코자키 궁(箱崎宮)을 재건하고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우사 신궁(宇佐神宮) 등 많은 신사를 보호하여 승려들에게 평판이 좋았고, 문화인, 구게들에게 '말세의 도인'(末世の道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18]
- 덴분(天文) 11년(1542년) 조선의 김안국(金安國)에게 서신을 보내 주자가 주석한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구했다. 김안국은 조선에서 사용하는 경전의 주석서는 정전(程傳)의 《주역》, 호전(胡傳)의 《춘추》, 채전(蔡傳)의 《서경》, 주전(朱傳)의 《시경》, 정주(鄭註)의 《예기》이며, 조선에서 통용되는 경전들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주석한 것은 없다고 회답하였다(《이칭일본전》).
- 어린 시절, 아이들이 돈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요시타카도 동전을 갖고 놀고 싶다고 하자, 호위 스기 시게노리(杉重矩)는 "주군이 되실 분께서 동전 같은 더러운 것을 보시는 것은 두렵습니다"라며 동전을 황금 고카이(笄)로 꿰어 오물 속에 던져 넣었고, 이를 요시타카에게 보여주어 돈을 천하게 여겨야 함을 인식시켰다고 한다(『무사 이야기』).
- 주도(衆道)를 좋아하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기독교 입장에서 남색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자 격노하여 하비에르를 내쫓았다는 일화가 있다.
- 요시타카가 스에 다카후사를 총애했을 때는 말을 타고 다섯 시간을 걸려 만나러 갔고, 다카후사가 깊이 잠들어 있어 와카(和歌)를 남기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 『음덕태평기(陰徳太平記)』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요시타카와 주도(衆道) 관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닌 문학적 측면이 강하여 신뢰하기 어렵다. 다카카게 ・ 스에 다카후사 외에도 기요노 시로(清ノ四郎), 야스토미 겐나이(安富源内) 등이 요시타카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한다.

6. 가계
7. 평가
- 산조니시 사네타카(三条西実隆) 등과 교류하며 와카(和歌), 렌카(連歌) 등 교토풍 구게(公家)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요시타카는 문치주의적 센고쿠 다이묘로 알려져 있다. 교토 조정에 자금을 바쳐 관직을 얻고, 소쿠타이(束帯) 차림으로 우차(牛車)를 타는 등 귀족적 취향을 보였다. 고서를 좋아하고 화압(花押) 형식을 따르는 복고주의적 성격을 보였다. 그러나 오우치 가문 역대 당주들이 대대로 그러한 경향이 강했기에 요시타카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이 무렵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西の京)라 불릴 만큼 번영했다.
- 정책적으로도 보수적이어서 사치금지령과 지세 징수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다. 사찰과 신사 부흥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으며, 다자이노다이니 임명 후에는 다자이후(大宰府)다이니로서 내리는 명령을 다이후센(大府宣)이라 불렀다.[26] 요시타카와 가신단의 관위도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처럼 자칭한 것이 아니라 교토 조정에 주청해 받은 실제 관위였다.
- 명나라, 조선과 무역했고,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싸워 감합무역(勘合貿易)을 독점했다. 조선에서 대장경 등 서적을 수입하여 오우치판(大内版)으로 출판했다. 야마구치 시가를 교토풍 조방제(条坊制) 도시로 정비하고, 성곽 없이 오우치 관을 거소로 사용했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초청, 야마구치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는 등 개명적인 인물이었다.
- 생전 주변 구니 무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하코자키 궁(箱崎宮)을 재건하거나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우사 신궁(宇佐神宮) 등 신사들을 보호하여 승려들의 평판이 높았고, 문화인, 구게(公家)들로부터 「말세의 도인」(末世の道者)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 1542년(덴분 11년) 조선 김안국(金安國)에게 서신을 보내 주자 주석 《오경신주(五經新註)》와 각루기(刻漏器)를 요청했으나, 김안국은 조선 사용 경전 주석서는 정전(程傳) 《주역》, 호전(胡傳) 《춘추》, 채전(蔡傳) 《서경》, 주전(朱傳) 《시경》, 정주(鄭註) 《예기》이며, 조선 통용 경전은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새로 주석한 것은 없다고 회답했다(《이칭일본전》). 마쓰시타 겐린은 요시타카 요청 신주란 1415년(영락 13년) 명 영락제 편찬 《오경대전주(五經大全註)》를 가리키는데 조선에는 이 책이 없어 김안국이 이렇게 대답했고, 이후 명의 배가 이 책을 싣고 일본으로 왔지만 요시타카는 보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 1543년(덴분 12년) 오토모 요시아키 차남 시오오토마루(후의 오우치 요시나가)를 양자로 삼아 오토모 씨와 관계를 개선했고, 이와미 국에서 오가사와라 나가오를 종속시키고, 빈고 국에서 칸베 전투, 후노 붕괴에서 승리, 오우치 씨 최대 판도를 구축했다. 사가라 다케토 중용은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갓산토다 성 전투 패전으로 인한 실의 때문은 아니었다.[10]
- 1547년(덴분 16년) 병부경에 임명되었으며, 덴류지 사코 슈료를 대사로 임명하여 마지막 견명선을 파견했다.
- 1548년(덴분 17년) 류조지 다네노부와 동맹을 맺었다. 다네노부는 요시타카에게서 편휘를 받아 다카노부라 칭했다. 다카노부는 오우치 씨 힘을 배경으로 가독 상속에 불만 품었던 가신들을 억눌렀다.
- 1550년(덴분 19년) 야마시로노카미가 되었다.[11]
- 1551년(덴분 20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포교를 허가하고 다이도지를 거점으로 하사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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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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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sell &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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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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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enodo.or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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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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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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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ttle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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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大内義隆――大内氏最大版図を築くも家臣に背かれる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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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口県地方史研究』第123号14~2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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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書類従 第14、516頁、経済雑誌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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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19巻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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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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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誠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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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広島県の文化財 - 藍韋肩赤威甲冑
https://www.pref.hir[...]
広島県教育委員会
2020-03-05
[17]
간행물
大内義隆――大内氏最大版図を築くも家臣に背かれる
戎光祥出版
[18]
웹사이트
福岡市の文化財
http://bunkazai.city[...]
福岡市HP
[19]
문서
公卿補任、国史大系10巻462頁、経済雑誌社
[20]
문서
『大内系図』
[21]
문서
『内藤譜録』
[22]
웹사이트
https://scholar.prin[...]
[23]
문서
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19巻112P
[24]
문서
불경 금강경의 사구게 구절이다.
[25]
웹사이트
広島県の文化財 - 藍韋肩赤威甲冑
https://www.pref.hir[...]
広島県教育委員会
2020-03-05
[26]
웹사이트
福岡市の文化財
http://bunkazai.city[...]
福岡市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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